통합검색
게시물 (11건)
-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
- 일제강점기에 결성된 시회, 만귀정시사 당시 만귀정에서는 멋스러움을 한시로 읊으며 세상을 논하는 시회가 결성되었다. 1939년 송광세(宋光世)가 지은 <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>가 세워져 있는데, 이 비문의 내용을 통해 1939년경 '만귀정시사(晩歸亭詩社)'라는 시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. 만귀정은 현재 광주광역시
- 정순조-동우 정순조선생 기공비
-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 4-1(송정공원)정순조鄭純朝(1888. 12. 7. ~ 별세)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. 부산제일상업학교를 졸업하고, 법성금융조합 이사, 국민회 광산군 지부장, 전남도 주조조합연합회장,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. 해방 이후 송정읍장이던 장안섭과 함께 1948년 광산군청사를 확보하는 데 노력해
- 전읍장묵암장안섭기적비
- 광주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만귀정 입구 도로변이 전읍장묵암장안섭기적비前邑長默菴長安燮紀跡碑는 송정읍장으로 있으면서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록해 1954년(단기 4287년)에 세웠다.대표적인 일화는 단돈 당시 70원으로 광산구 청사 부지를 확보했다는 것이다. 옛 광산구 청사는 일제 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
- 장안섭-묵암정사 원운
- 청류교
- 한 걸음이면 뛰어넘을 앙증맞은 다리가 있다.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 있는 만귀정 옆길이다. 그냥 지나치면 잘 보이지 않는 다리이다. 청류교(淸流橋)이다. 언제쯤 세웠을까 다른 쪽 교각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‘무인앙춘 묵암가설(戊寅仰春 黙菴架設)’이라는 글씨가 휘갈겨 있다. 만귀정을 중건한 묵암 장안섭이 1938
- 세하-만귀정(晚歸亭)
- 만귀-정(晚歸亭) 【정】 동하 앞에 있는 정자. 전 광산읍장 장안섭(張安燮) 등이 늘그막에 시를 읊으며 놀았다 함.
- 세하-동하(洞荷)
- 세동 동북쪽에 있는 큰 마을동하마을은 조선 초기에 청주한씨가 입촌하여 생성된 마을로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형국이 연하꽃과 같고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. 서 창관내 서부 중앙부에 위치하여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송정평야의 넓은 들이 펼쳐져 그들가운데 극락강이 흐르고
- 영식재
- 광주시 서구 전평길 62(매월동)1929년매월동 개산마을에는 흥성 장씨興城張氏의 향제소享祭所이며 효우공孝友公 장창우張昌友(1704~1774)의 제향을 위한 재각이 영식재永式齋이다. 1928년 11월 문중회의에 의해 건축하기로 의결하고 1929년 8월에 건립되었다. 장정섭張整燮 장안섭張安燮 장창섭張昌燮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
- 만귀정/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(1984. 2. 29.)
- 서구 동하길 10(세하동)만귀정晩歸亭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(1704∼1774)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일제강점기 정자이다. 원래 건물은 소실됐으나 1934년에 다시 중건됐고, 1945년에 고쳐지었다. 앞면 2칸,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, 지붕은 옆면에서
-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
- 서구 동하길 10 (세하동)서구 세하동,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서창평야의 넓은 들고 그 가운데로 극락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이다. 넓은 서창평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마을 입구에 자리한 옛 정원형 정자가 있다. 마을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3개의 정자가 나란
- 광주를 이끌어온 광주의 중심
- 서구의 이름과 연혁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으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남부·서부·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45개 동으로 구성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가 신설되었다. 남부출장소의 사·구·양·월산·농성·백운 등 14개 동, 서부출장소의 유·누문·북·임·상무 등 15개 동, 지산출장소의 본촌·우치·삼소 등 16개 동을 합해 광
이전
1
다음